박준 (한국)

시|문학동네|2012

★★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모래내 그림자극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 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같이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중략)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같이 고음(高音)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1

소매가 까매질 때까지 살았다 보증금도 없이 우리는 내려앉아 서로의 끝을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입술을 깨물던 당신의 꿈에 광부들은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날 나의 문명(文明)이었다 광부들이 부는 휘파람은 탄광 입구의 새소리를 닮았다가 무너지는 갱도에서 새나오던 가스 소리를 닮았다가 혼(魂)들의 울음소리를 검게 닮아간다


2

손이 찬 당신이 투명한 잔을 내려놓았다 번져 있는 입술자국이 새가 날아오르기 전 땅을 깊게 디딘 발자국 같았다면 살아남은 말들은 쉽게 날 줄을 알았다 나는 가난하고 심심한 당신의 말들에 연을 묶어 훠이훠이 당기며 놀았다 사실 우리 아름다움의 끝은 거기쯤 있었다


3

버스를 타고 나간 사람을 정류장에서 기다리듯 하늘로 나간 당신의 말들은 하늘을 보며 기다려야 한다 당신과 잠시 만난 공중(空中)을 눈에 단단히 넣어두고 나는 눈을 감는다


4

그러니까

소매든 옷깃이든 눈빛이든


5

이곳보다 새카맣게


47
MYOYOUN 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