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페나크 (프랑스)
소설|문학과지성사|2015
*Journal d'un corps
★★★
거울 속의 아이는 내가 아니고 거울 속에 버려져 있는 어떤 사내아이일 뿐이라는 인상. 거울 속의 아이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괴상한 장난은 엄마를 화나게 했지만 아빠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들아, 넌 미친게 아니야, 넌 네 느낌과 놀고 있는 거야. 네 나이의 아이들이라면 다 그렇지. 넌 네 느낌에게 질문을 던지지. 아마 끝없이 계속 물을 거다. 어른이 돼서도. 아주 늙어서까지도. 잘 기억해두렴. 우린 평생 동안 우리의 감각을 믿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단다. -32p
치통. 혹은 통증의 유혹. 자다가 치통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공중으로 튀어 오를 만큼 한바탕 놀라고 나니 오히려 그 고약한 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충치가 감전을 시키다니. 그건 전기 충격과 매우 흡사한 통증이었다. 감전이 그렇듯 치통도 사람을 지독히 놀라게 한다. 입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꿈꾸고 있던 혀가 난데없이 2~3천 볼트의 전기 충격을 받으면! 그건 극히 고통스럽지만 순간적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홀로 치는 번개. 이 통증은 확산되지 않고 엄격히 자기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가 금세 약화된다. 놀란 직후에도 언제 그랬나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확인해보려는 위험한 장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혀로 아주 조심스레, 지뢰 제거병처럼 신중하게 조사를 한다. 잇몸을 건드려보고 의심 가는 이의 내벽도 검사하고, 마지막으로 이의 윗부분까지 가보고 아래로 미끄러진다. 느릿느릿, 안테나를 움직이면서. 조심을 했거나 말거나 또다시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감전을 당하고 나면 이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토록 순간적인 통증의 기억을 머릿속에 오랫도안 지니고 있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한 차례 확인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다 또다시 감전! 혀는 당장 오그라든다. 치통, 짓궂은 녀석. -167p
인간은 극사실주의 속에서 태어나 점점 더 느슨해져서 아주 대략적인 점묘법으로 끝나 결국엔 추상의 먼지로 날아가버린다. -215p
오늘날에도 몸에 관해 말하는 건, 몸의 영혼에 관해 말할 때에만 용인된다. 정신신체 의학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것이다. 즉 몸의 병을 성격적 결함의 발현으로 보는 것. 화 잘 내는 사람에게는 수포가 잘 생기고, 폭음하는 자는 관상동맥경화에 걸리기 쉽고, 비관주의자는 알츠하이머병을 피할 수 없고. 아픈 것도 괴로운데 아픈 것에 죄의식까지 느껴야 하다니. 자넨 뭐 때문에 죽는지 아는가? 자네가 저지른 나쁜 짓 때문에, 올바르지 않은 것과 타협한 것 때문에, 불순한 짓을 저질러 한순간의 이익을 본 것 때문에 죽는 거야. 한 마디로 자네 성격 때문이지.
…정신신체 의학이 죄인을 지목하는 건, 실은 죄가 없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여러분, 우리의 몸은 무죄입니다. 우리 몸은 무죄 자체입니다. 바로 이게 정신신체 의학이 주창하는 바이다! 친절하기만 해도, 올바르게 행동하기만 해도, 절제된 환경 속에서 건전한 삶을 영위하기만 해도, 영혼만이 아니라 몸 자체도 영생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난 젊은 시절처럼 격앙해서 긴 독설을 늘어놓았다. -375p
장례는 단지 의례였을 뿐, 난 홀로 분노를 곱씹으며 슬픔을 키워갔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죽을 때 우리에게서 뭘 앗아가는지 알아채기란 쉽지 않지. 애정의 둥지가 없어졌다는 건 견딜 수 있더구나. 감정에 대한 신뢰, 공감의 희열을 잃는 것도 마찬가지고. 죽음이 상호 간의 관계를 앗아가는 건 사실이지만, 기억 덕분에 그럭저럭 보상이 되거든. 그들은 몸이 살아 있는 동안 기억할 거리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 기억들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내가 그리워한 건 그들의 몸이었으니까! 내 앞에 마주하고 있어 손만 뻗치면 만질 수 있는 몸, 그거야말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몸들은 더 이상 내 풍경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육체적 존재가 갑자기 얼마나 그립던지! 그들 없는 세상이 얼마나 허전하던지! 당장 여기서 그들을 보고, 그들을 느끼고, 그들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후추 냄새 나는 아줌마의 땀, 티조의 허스키한 목소리, 거의 꺼져가는 아빠의 숨소리,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그레구아르의 탄탄한 몸. 머리가 맑은 순간이면 난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내가 무슨 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어떤 몸 타령을 하고 있는 거냐? 티조는 거무튀튀하고 덩치 크고 호방한 친구가 되기 전엔 목소리는 가늘고 비쩍 마른 다섯 살짜리 어린애였는데, 넌 그중에 어떤 티조를 얘기하는 거냐고. 그레구아르 역시 우람한 근육에 세련된 매너의 청년이 되기 전엔 아기 목욕통 속에 들어 있던 조막만 한 아기였는데, 어느 그레구아르를 얘기하는 거냐! 어쨌든 너무도 분명한 건, 내가 그레구아르의 몸을, 티조의 몸을, 비올레트 아줌마의 몸을, 한마디로 그들의 육체적 존재를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447p
*아쿠아 알타(acqua alta) : 이탈리아어로 '높은 물'이라는 뜻으로, 베네치아에서 주기적으로 바닷물이 넘쳐, 발이 잠길 정도로 홍수가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모르비도(morbido) : 이탈리아어로 온갖 형태의 감미로움을 뜻함 / 모르비디테(morbidité) : 프랑스어로 병적인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