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HBO 이름값이 대단하다. 1시간이 15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지만 긴박하게, 혼란스럽지만 정적으로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원자력 폭발 사고의 전개 과정을 그려낸다. 특히 에피소드 1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두 손을 모으고 봤을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냉전시대의 소련과 원자력의 금속성에서 연상되는 '청회색' 색감 또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일어나는 책임 전가나 사실 은폐는 이미 붕괴한 사회주의 체제 하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나 그들의 지난 독재를 비난하는 현재에 이르러서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그 자신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물론 국민들에게는 국가를 위험에 빠트릴 기밀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 어떤 진실도 알리지 않은 채 말이지. 이후 우리가 알게 되는 진실이란 결국 거짓이라는 위선으로 가득 찬 사건의 파편일 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한낱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진실에 대한 외면이 만들어낸 위대한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지구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생명체는 단연 인간이며 인류는 틀림없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재앙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지적인 생명체라 자만하며 스스로의 일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종족.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종족의 일원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넌더리가 난다.
개인적으로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며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호뮤크는 유독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캐릭터라 다소 아쉬웠는데 엔딩에 이르러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가장 큰 인물 변화를 보이는 보리스가 감정적이지만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현실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작 5편의 에피소드로 사건 발생 - 사건 수습 - 사건 재구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며 엔딩까지 완벽한 드라마. What is the cost of lies? 이 한 문장이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모든 것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