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그리스 비극의 정치·사회적 맥락
1) 테바이 배경 비극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테바이를 폭군이 지배하는 사회, 신들의 불문율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 명예로운 행동이 짓밟히는 사회, 남자와 여자가 전도된 사회, 왕가 여성이 결혼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되지도 못하여 왕실의 후손이 끊어지는 사회로 그려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테네는 민주정의 나라, 신들을 경외하는 나라, 남성이 남성다운 사회, 자손이 번창하는 사회로 그려지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즉, 이전에는 존재조차 미미하던 안티고네가 소포클레스의 극에서 영웅적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테바이라는 나라가 여자와 남자가 전도된 사회, 그래서 안티고네 같은 여성들의 미덕으로 남성적 미덕의 빈자리를 메워가야 하는 기형의 사회, 저주받은 사회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테바이가 아테네에 대한 위협을 날로 증폭시켜가던 무렵 공연되었으므로, 더욱 성공을 거두었던 듯하다.
3) 스파르타 배경 비극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는 두 개의 왕가에서 나온 두 명의 왕이 있었고, 최고 행정관 다섯 명이 왕권을 견제하고 있었다는 점, 30명으로 구성된 귀족 협의체가 있었다는 점, 그러면서도 스파르타 시민들은 호모이오이, 즉 동등자로 여겨졌다는 점은 스파르타의 정치체제가 상당히 복합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스파르타이오이라 불렸던 스파르타 시민들은 방대한 할당지를 소유한 전사계급이자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주변 지역 거주자들인 페리오이코이 및 토지를 경작하던 스파르타인 주인을 부양하던 노예 헤일로타이와는 신분상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스파르타에는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도시 중심부와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주변 전원 지역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중심부에는 시민들이, 주변부에는 페리오이코이·헤일로타이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소 자영농 시민들이 주변 전원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아테네의 모습과는 다르다. 또 척박한 곳에 자리 잡은 아테네가 일찍부터 살길을 찾아 해외로 진출했던 데 비해, 비옥한 땅을 가진 스파르타는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므로 바깥 세계와의 교류가 적어 그만큼 폐쇄적인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파르타에 성벽이 없었다는 것은 군사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국제 정세에서 중국의 위상이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와 스파르타 관계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힘의 전환기에 패권국과 신흥 강국 사이에 종종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경향을 일컫는 용어이다. 전통적으로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던 스파르타에 이어 신흥 아테네의 세력과 위상이 부상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긴장과 무력 충돌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5세기 중엽의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특히 5세기 후반의 (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2부. 그리스 비극의 종교·사회적 맥락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나라의 축제를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근 지역들을 통합하는 집주synoikismos 과정을 거쳐 성장해온 아테네에는 수많은 축제와 제전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거의 한 덩어리로 형성되었던 스파르타에선 전 국가적 차원의 제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아테네에서는 각 지역의 단합과 충성심을 끊임없이 고취할 필요에 따라 다양한 제전이나 의례 등이 발달되었던 반면, 스파르타에선 그럴 필요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제전이 발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도시 디오니시아가 단순하게 도시 병합 축제와만 관련한 축제라면 관례상 아테네에서 엘레우테라이 지역으로 가는 행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축제의 핵심은 아테네 도시 중심부에서 이루어졌고, 행사의 핵심도 아테네에 도래한 디오니소스 신을 환영하는 데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대 디오니시아는 단순한 병합 축제를 넘어서, 고대의 빈번한 관행이었던 에보카티오의 의례와도 연관된 것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이 점이야 말로 대 디오니시아가 아테네의 가장 중요한 축제로까지 발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거이 아닌가 한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은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있었다. 따라서 각 폴리스의 최대 현안이야말로 바로 폴리스의 안녕과 존폐에 있었고, 각 폴리스의 운명이 걸려 있었던 전쟁이나 외교 문제야 말로 지상과제였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종교적 요소나 관행이 군사력이나 정치적 협상력 같은 실제적 수단 못지않게, 혹은 이를 초월한 만큼의 의미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처하는 여러 종교적 관행이나 기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이 에보카티오evocatio 의식이었다. 에보카티오는 '불러내다'라는 라틴어 evoco에서 나온 단어로, '신 모셔내기' 혹은 '신 불러내기'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에보카티오 의식은 전염병, 흉년, 특히 전쟁 같은 불가항력적인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도움을 줄 신이나 영웅을 영접하는 의식이다. 특히 전쟁 시에는 적국의 신을 회유하기 위해 더욱 빈번하게 행해졌다.
에보카티오 의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먼저 해당되는 신이나 영웅을 영접하는 의식과 함께 성대한 희생 제사와 기도를 드렸다. 또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들이 만족할 만한 시, 노래, 춤, 연극 등을 바쳤다. 특히 춤이나 노래는 신들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바치는 것은 신이나 영웅의 호의를 얻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신들에게 바쳐진 가무 가운데 특히 디오니소스 신과 관련된 가무가 디티람보스였다.
이러한 에보카티오 의식은 고대인들의 신이나 영웅 숭배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고대인들에게 신의 송소나 영웅 유골은 이를 보유한 도시의 운명과 성패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그 공동체에 행운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았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매장 의례를 둘러싼 무덤 숭배 및 영웅 숭배의 요소가 중요한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자기 조국 땅이 아니라, 아티카의 콜로노스에 묻히기를 원한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나, 역시 아티카 땅에 묻혀서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한 아르고스 왕 에우리스테우스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실제 그들이 아티카 땅에 묻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테네 비극작가들은 그렇게 각색하기를 좋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수호신이나 수호 영웅은 자신의 성소가 있거나 무덤이 있는 곳을 지키고 보호함으로써 공생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 디오니시아 제전도 에보카티오적 의미를 가지면서 성장했다고 생각된다. 대 디오니시아 제전은 엘레우테라이 등 새롭게 편입된 지역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 기능을 갖는 동시에, 적대적 국가의 수호신을 불러내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겨냥했던 나라는 역시 디오니소스 신을 수호신으로 했던 테바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