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예술가는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예술은 드러내고 예술가는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비평가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다른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논거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저급한 형식의 비평에서와 같이 비평이 추구하는 최고의 형식 역시 자서전 양식이 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것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타락한 사람이다. 이건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책,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어떤 예술가도 무엇을 입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실제로 입증할 수 있는 것조차 굳이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윤리적인 동정심이란 용납될 수 없는 문체상의 버릇이다.
병적으로 우울한 예술가는 없다. 예술가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사고와 언어는 예술의 도구다.
예술가에게 악과 선은 예술의 질료다. 형식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예술의 모범은 음악가가 내보이는 예술이다. 감정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의 기교가 바로 유형이 된다.
모든 예술은 표면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표면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상징을 읽는 사람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다. 진정으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관객이지 삶 자체는 아니다.
한 예술 작품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살아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비평가가 예술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을 때다.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유용한 물건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었을 때 그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그것을 지독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정말 쓸모없는 것이다.
-제11장-
이따금 우리는 동이 트기 전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죽음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불면의 밤을 지내고 난 뒤 그럴 수도 있고, 공포나 별난 희열 속에 밤을 지내고 난 뒤 그럴 수 있다. 그럴 때면 현실 그 자체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그러면서 그로테스크한 모든 것에 잠복해 있으면서 고딕 예술, 흔히 혼란스러운 몽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그 고딕 예술에 끈질긴 활력을 부여하는, 생기에 넘친 생명력으로 가득 찬 환영들이 우리 머릿속 여러 공간을 휩쓸고 지나간다. 서서히 하얀 손가락 같은 여명의 빛줄기들이 커튼을 통해 기어 들어오고, 그러면 커튼은 부르르 몸을 떤다. 환상적인 검은 의상을 입은 말없는 그림자가 방 구석구석으로 기어 들어가 그곳에 웅크리고 앉는다. 밖에서는 나뭇잎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새들의 소리와 일터로 나서는 사람들의 소리, 혹은 산허리를 돌아 나와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그러나 자줏빛 동굴과 같은 집에서 잠은 반드시 불러내야 한다는듯 고요한 집 둘레를 배회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어스레한 얇은 장막이 하나둘씩 걷히면서 서서히 사물의 형태와 색이 회복되고, 우리는 새벽이 세상을 그 옛 모양대로 다시 드러냄을 지켜본다. 어둠을 안고 있던 거울도 점차 그 모방의 삶을 되찾는다. 불 꺼진 가는 초는 우리가 두었던 그곳에 그대로 서 있고, 그 옆에는 우리가 읽다가 그대로 펼쳐 놓은 책이 놓여 있다. 무도회를 장식했던 철사로 묶은 꽃, 뜯어 보기 겁이 나서 그대로 뒀거나 읽고 또 읽고 싶어 놔둔 편지. 어떤 것도 변한 게 없는 듯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삶이 밤이 뿌려 놓은 환상적인 어둠 속을 빠져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떠났던 지점에서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면 우리 머릿속에 스멀스멀 기어 들어노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판에 박힌 습관의 삶을 지루하게 또다시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밤새 어둠 속에서 완전히 새롭게 변한 세상, 사물이 새로운 모양과 색을 지니게 되거나 변해 있는, 혹은 예전과는 다른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 새로운 세상, 과거가 더는 자리 잡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쨌든 의무나 회한을 모르는 상태 속에서 나름의 쓰라림을 지닌 기쁨에 대한 회상이나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에 대한 기억을 다 지워 버린 그런 새로운 세상을 보았으면 하는 엉뚱한 소망을 그려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도리언 그레이는 인생의 유일한 진정한 목적, 혹은 진정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면서 동시에 유쾌함을 주는 감흥, 낭만적 사랑에 필수적인 어떤 낯섦의 요소를 지닌 새로운 감흥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종종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색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 생각의 미묘한 작용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곤 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지닌 독특한 특성과 묘미를 만끽하면서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 다음에는 그의 독특한 열의가 넘치는 기질에 양립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느 현대 심리학자에 따르면 그런 기질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이상하리만치 냉담한 태도로 그런 생각을 물리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