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18

 

 

1. 요즘은 '깊은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저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인지 데이그램도 토막난 단상인 채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 본래 일상생활 중에 떠오른 생각들을 남는 시간이나 자기 전에 완전한 문장들로 다듬곤 했었는데. 그래도 문득 뜬구름처럼 흘러가는 생각들을 미약하나마 붙잡아 두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게 있어서 글이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추악한 감정의 배출구이기도 하니까.

 

 

2. 알약 세 개만 먹으면 하루의 영양소와 배고픔이 충족되는 삶을 살고 싶다. 하루 삼시세끼 챙겨 먹는 거 너무 귀찮잖아요. 배꼽시계는 또 얼마나 정확한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너 밥 먹을 시간이야'라고 온몸에서 양식을 공급하기를 재촉한다. 가끔 인간은 배고픔의 노예가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 배를 채운 후에는 그저 또 다음 식사를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갈 뿐이지.

 

 

3. 라캉에 따르면 피분석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말할 때의 시제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말하는 단순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그때에 이미 완료한 행위를 나타내는 전미래형이다. ('나는 저녁까지는 일을 끝마칠 것이다.'와 같은 방법)

내가 과거의 사건을 '생각해내는' 것은 지금 나의 회상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즉 타자에 의한 승인을 얻기 위해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서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이다.

라캉이 '자아moi'와 '나je'와 '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이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아무리 해도 말이 나오지 않는' 일은 우리 주위에서 종종 일어난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 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다. 주체가 '나'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自己定位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이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의 '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이다.

'자아'는 이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상대가 있는 대화 속에서 '나는 ○○이다'라는 말투로 자기동일화를 이루는 주체이다. '나'는 주체가 '전미래형'으로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즉 '자아'와 '나'는 주체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주체는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아'와 '나'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분석가의 작업은 그것을 지원하는 일이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손 가는대로 마구잡이식으로 철학책을 읽었음에도 나의 철학뽕 계보가 구조주의로의 사상사적 흐름과 그 궤도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내가 '라캉'을 이해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으므로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까지 그 여정이 꽤나 험난할 것 같다.

 

 

4. 지나간 날에 연연하지 말고 앞만 보고 나아가자.

 

 

5. 타인이 나한테 닿는 것도 싫고, 엄청 큰 소리로 음식물 씹는 사람도 싫고, 하나하나 동작이 요란스러운 사람도 싫다. 이 정도면 나는 그냥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6. Topaz Love

우리가 지나온 青春の輝き 그 자체, 반짝반짝 빛이 난다.

빛나던 청춘의 한가운데에서는 미처 느낄 수 없었던 서툴었기에 더욱 특별한 추억들을

인생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애틋하면서도 담담하게 그 가치를 재확인한다.

마치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발자취를 먼지 쌓인 일기장에서 발견해내는 느낌이랄까.

이 곡이 탄생한 배경이나 서사 또한 감동 그 자체.

20대 초반의 합작곡이 아이카타,

30대 후반의 합작곡이 토파즈 러브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하면서도 킨키다운지 모르겠다.

곡을 통해 후타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서로의 마음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아슬아슬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지난 세월들이 이토록 단단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다듬어 낼 수 있었던 거겠지.

지난 세월의 내공이 느껴지는, 우연과 필연 그 모든 타이밍이 간절하게 빚어낸 곡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린 코끝, 맑고 푸른 하늘, 마주잡은 두 손, 함께 두른 포근한 목도리, 이 모든 것들이 아스라이 스치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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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YOUN 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