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비스 세상

물품이 점점 정보 집약화, 쌍방향화하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물품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물품은 제품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진화를 거듭하는 서비스로 탈바꿈한다. 물품의 가치는 물품을 구성하는 재료나 물품을 담는 통이 아니라 물품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얼마나 접속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결국 물리적 형체보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서비스가 중요하다. 고객이 정말로 구입하는 것은 물품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접속권이다.



7. 삶으로서의 접속

미디어 역사학자이며 평론가인 조슈어 마이로위츠는 전자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역사적 지리> 감각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세계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지리적 준거점도 없는 상태에서 점점 많은 시간을 관계의 뒤얽힘 속에서 보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공간적 기준점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적극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지리적 주소는 이메일 주소에 의해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다. 사업이나 사회 활동에서 지리적 주소의 사용 빈도가 무섭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공간적 장소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화되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8.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

문화 생활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늘 접속과 포함의 문제에 직결된다. 사람은 공동체와 문화의 일원으로 의미와 경험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권리를 누리든지 배제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공동체가 공유해 온 문화가 네트워크 경제에서 자꾸만 파편화된 유료 경험으로 쪼개지면서 접속권도 자연히 사회적 영역에서 상업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제 접속권은 전통, 통행권, 가족과 친족의 유대, 민족, 종교, 성 같은 자연적 기준이 아니라 상업 광장에서 통용되는 경제력에 따라 부여된다.


<쾌적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철새들>로 불리기도 하는 이 선구자들은 서부 평원과 로키 산맥 일대의 얼굴을 바꾸어놓고 있다. 그들은 서부에 남아 있는 웅대한 자연미를 감상하기 위해 거액을 뿌릴 수 있는 여유와 용의가 있는 부자들이다. 스태퍼드 대주교는 <우리가 추진하는 새로운 유형의 개발은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놀이 공원 같은 '별개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로키 산맥의 놀이 공원 주변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완충 지역이 점점 확산될 것이다.> 서부는 미국 부자들의 <여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다고 스태퍼드 대주교는 결론짓는다.



10. 탈근대

- 탈근대성

물리학자들은 원자가 결코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원자는 지금까지 물리학에서 말해 온 그런 물질이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힘들의 집합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영향 관계는 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 관계는 <운동의 리듬이 생길 만큼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언젠가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하나의 음은 순간의 차원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의 음이 어엿한 음으로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선행음과 후속음이 필요하다. 하나하나의 원자가 시간 속에서 성립하는 관계의 집합이라면 <특정한 순간에 하나의 원자는 관계로서의 특징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과정과는 무관한 구조라는 낡은 관념은 폐기 처분된다. 새로운 물리학은 존재와 운동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물은 시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불변의 법칙에 바탕을 둔 현실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창조적 행위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자연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을 모든 고비에서 드러내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일찍이 현실의 수효는 관점의 수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관점주의 이론은 단순하고 인식 가능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라는 근대적 발상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오르테가가 대신 내놓은 것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한사람 한사람의 독특한 삶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무수히 많은 현실들이었다. 그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탈근대적 사유방식을 <나는 나와 주변 상황의 합>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탈근대론자는 심지어는 과학조차도 정교하게 구성된 텍스트나 이야기의 집합이며 과학의 권위는 그런 텍스트나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제시하여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근대가 목적을 추구했다면 탈근대는 유희를 추구한다. 내용 여하를 막론하고 아무튼 질서라는 것은 무조건 답답한 것, 숨막히는 것이라고 요즘 사람은 생각한다. 반면에 창조적 무질서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권장하는 쪽에 가깝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질서는 자발성이다. 탈근대의 분위기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진지하지 않다. 아이러니, 역설, 회의가 득세한다. 역사를 만드는 것보다는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더 관심을 보인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군림하면서 자연이나 사회를 지배하던 역사적 틀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관심 자체도 시들해진다. 역사는 이제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투시하기 위한 참조틀이 아니라 언제든지 재활용할 수 있고 현대 사회의 각본에 써먹을 수 있는 느슨한 이야기의 단편처럼 되어버렸다.

현실을 이리저리 건너뛰면서 촌각을 다투는 현대 문화의 빠른 속도는 개인과 집단이 가진 시간의 지평을 현재라는 짧은 순간으로 축소시켰다. 전통과 유산 앞에서 사람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에서도 사회 생활에서도 절정감과 카타르시스는 효율성과 생산성보다 윗자리에 놓인다. 쇼와 연예, 정교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세련된 공연으로 이 세상은 가득 찬다. 종교 개혁부터 산업 혁명까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해 온 <현실 원칙>은 폐위되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버림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쾌락 원칙>이 군림한다.


- 변화 무쌍한 인간형

19세기만 하더라도 사람은 고정된 자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증식되는 상품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인생은 무언가를 부단히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과정>이 <존재>를 압도하게 되었다.

자아 개념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소유 관계라는 비유가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데 더없이 유효 적절하게 쓰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마이클 우드와 루이스 주커 두 사회학자는 『탈근대 자아의 전개』라는 책에서 <누적된 노력을 통해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자아가 부단한 과정 속에서 각성되고 발견되고 실현되는 현재 지향의 자아>로 변모하는 양상에 주목한다. 이제 자아는 만들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아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재편집되는 이야기의 전개로 여겨진다.


- 마음의 개조

컴퓨터 통신은 직선으로 전개되지 않고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순서와 인과는 밀려나고 그 자리에 연속적이고 통합된 활동의 총체적 장이 들어선다. 인터넷 세계에서 주체와 객체는 접속점과 네트워크로 바뀌며 구조와 기능은 과정 안으로 흡수된다. 컴퓨터의 조직 방식, 특히 병렬 계산은 문화 체제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모든 층위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쇄신되는 역동적 문화의 관계망 안에서 모든 부분은 하나로 접속점이 된다.

책이 단선적이고 경계선이 분명하고 고정되어 있다면, 하이퍼텍스트는 연결 지향적이며 원리적으로는 딱히 경계선을 정할 수가 없다. 책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며 독립된 형식으로 존재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배타성을 거부하며 관계를 좇는다. 요컨대 책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책은 완전하다. 하이퍼텍스트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지 않다. 관련된 자료들을 사용자가 연결짓기 시작하는 출발점이 있을 뿐이다. 하이퍼텍스트는 부단히 변신한다. 하이퍼텍스트는 완성이라는 것을 모른다. 책은 결과이지만 하이퍼텍스트는 과정이다. 책은 오래도록 소유하는 것이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순간순간 접속하는 것이 제격이다.


관계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개인의 사회적 역량에도 변화가 온다. 전통 문화에 내재되었던 비교적 안정되고 통합된 자아 감각은 경합을 벌이는 다채로운 잠재적 자아들에게 밀려난다. 수시로 바뀌고 연결되면서 각축을 벌이는 자아들의 거센 물살 속에서 헤엄쳐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모든 개인의 의식을 끌어당기는 이 엄청난 사회적 상호 작용의 힘은 중심에 포진해 있던 자아를 무너뜨린다. 사방에서 경쟁적으로 밀어닥치는, 때로는 모순된 사회적 담론의 거센 파도에 휘말려, 우리는 시대가 그때그때 요구하는 대로 우리의 유한한 정신자원을 잘개 쪼개어가면서 필사적으로 부응한다. 이렇게 끝없이 짧게짧게 이어지는 단편적 연결의, 미로같이 복잡한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서서히 잃어갈 위험성에 봉착한다. 거건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이 자아 관념의 파편화는 조리가 없고 일관성이 없는 관계들의 복수성과 맞물려 나타난다. 이런 관계들은 무수히 많은 방향에서 우리를 끌어당기면서 다양한 역할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윤곽을 가진 <진정한 자아>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완전히 포화 상태에 이른 자아는 더 이상 자아가 아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탈근대 의식>이라고 거건을 비롯한 학자들은 지적한다.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활동이 연결되는 네트워크와 상품화된 관계로 이루어진 이런 탈근대 세계에서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의식은 서서히 시대에 뒤진 것으로 낙인 찍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무수히 연결된 관계망 안에 있는 하나의 접속점처럼 행동하는 새로운 개인이다. <이 탈근대 세계의 최정 단계에 이르면 자아는 관계의 단계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자신이 파묻혀 있는 관계망에 독립된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서양 역사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한복판을 차지해 온 자아는 밀려나고 그 빈 자리로 관계가 밀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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