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오스트리아)
사회|사월의책|2015
*Shadow Work
★★★★
1장. 사회를 결정하는 세 가지 차원
기본적으로 '발전'이란 개념은 자급자족 활동이 지닌 폭넓고도 의심할 여지 없는 능력을 상품 사용과 소비로 대체함을 뜻한다. 또한 발전은, 임금 노동이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에 대해 독점을 행사하는 것, 전문가의 설계에 따라 대량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관점에서 필요를 재정의하는 것, 환경의 재편을 통해 시간, 공간, 물질 설계를 생산-소비에 적합하도록 바꿈으로써 사용가치 중심의 활동을 저하시키고 마비시켜서 필요를 직접 충족할 수 없게 하는 것 등을 뜻한다. 전 세계에서 판박이처럼 펼쳐지는 이 모든 변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다. -31p
'발전'의 개념이 탈바꿈해 온 단계 -35p
야만인(barbarian) - 이교도(pagan) - 불신자(infidel) - 미개인(wild man) - 원주민(native) - 저개발국민(underdeveloped people)
2장. 토박이 가치
토박이말을 버리고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모어로 전환한 것은 상품집약적 사회의 도래를 예고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도 모른다. 토박이말로부터 가르치는 언어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모유에서 분유로, 자급자족에서 복지로,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에서 시장가치를 위한 생산으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교회와 국가로 양분되어 있던 세상에서 교회가 주변부로 밀려나고 종교가 사적인 일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어머니 역할이 국가의 것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전에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교육의 울타리 밖에서는 읽기도 쓰기도, 어쩌면 말하기도 불가능하게 될 터였다. 사람들은 군주의 자궁에서 새로 태어나 그녀 품에서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될 것이다. 근대 국가의 시민과 모국어가 함께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79p
3장. 자급자족을 상대로 한 전쟁
언어 가르치는 일이 직업이 되면서 비용도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말은 오늘날 국민총생산을 구성하는 시장가치들 중에서 가장 큰 두 부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한다. 무엇을 말할지, 누가 말할지, 언제 어떤 사람들에게 그 말을 듣게 할지는 돈이 결정한다. 말을 뱉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클수록 사람들은 더 뚜렷한 반향을 기대한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대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가난뱅이가 부자처럼 말하고, 환자가 건강한 사람처럼 말하며, 소수가 다수처럼 말하도록 하는 데 돈이 쓰인다. 우리는 아이와 교사의 언어를 개선하고 교정하고 확장하고 갱신하는 데 비용을 지출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전문용어에는 더 많은 돈을 쓰고, 고등학교에서 십대들이 이 용어을 맛보도록 하는 데는 더더욱 많은 돈을 쓴다. 하지만 이런 맛보기는 특수한 종류의 언어를 구사하는 심리학자, 약사, 사서에게 의존해야겠다고 느낄 딱 그만큼만 제공된다. 이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표준어를 내세워 민족어나 흑인언어, 촌뜨기 사투리를 깎아내린 뒤에, 그 유사품을 학문적 주제로 가르친답시고 또 돈을 쓴다. 관료와 연예인, 광고인과 언론인, 소수민족 정치인과 '급진적' 전문가는 강력한 이익집단을 구성하여 언어라는 파이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려고 다툰다.
…에너지 단위인 와트(W)는 언어 단위인 단어보다 확실히 민주적이다. 학습되는 언어는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훨씬 큰 소음에 시달린다. 반면에 부자는 개인교사를 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침묵을 구입하여 자신의 상류층 토박이말을 보호할 수 있다. 교육자, 정치인, 연예인이 확성기를 들고 멕시코의 오악사카, 인도의 트라방코르, 중국의 농촌 마을에 들어서는 즉시, 가난한 사람들은 토박이말의 바탕을 지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사치품인 침묵을 빼앗기고 만다. -112p
집에서 조리한 음식과 냉동식품이 맛, 정성, 만족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데는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를 따져보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평등한 권리와 형평성, 빈민 봉사에 헌신해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토박이 가치와 경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따라서 관리할 수 있는 가치 사이의 차이점을 제시하면,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의 교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소한 경제외적 문제에 치중하느라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기본적 필요와 연관된 상품의 공정한 분배를 먼저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지금까지 토박이 가치를 보편적 상품으로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는 평등이 아니라 '빈곤의 현대화'―그것도 위계화된―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분배제도하의 빈민은 '시장에 거의 또는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토박이 활동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빈민은 언어 면에서나 활동 면에서나 토박이 영역에 대한 접근이 가장 가로막힌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토박이 활동에서마저 가장 작은 만족밖에 얻을 수 없다. -128p
5장. 그림자 노동
내가 주제로 택한 것은 산업 경제의 가려진 측면, 더 구체적으로는 노동의 그림자 측면이다. 산업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보완물로 요구하는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급의 봉사는 자급자족에 기여하지 않는다. 임금 노동이 그렇듯이 오히려 자급자족을 파괴할 뿐이다. 나는 임금 노동의 이런 보완물을 '그림자 노동'이라 부른다. 그림자 노동의 예로는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 장보기, 학생들의 벼락치기 시험 공부, 직장 통근 등이 있다. 이밖에도 어쩔 수 없는 소비로 인한 스트레스, 의사의 지겨운 지시를 고분고분 따르기, 관에 대한 순종, 강요된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그리고 '가정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수많은 활동들이 포함된다.
그림자 노동의 필요성과 범위,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산업 생산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산업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감춰져 있다. 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모든 활동―주로 사회적 수단을 통해 강요된다―은 노동이라기보다는 필요 충족 행위로 간주된다.
그림자 노동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피해야 한다. 첫째, 그림자 노동은 자급자족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 노동은 사회적 자급자족이 아니라 공식 경제에 기여한다. 둘째, 그림자 노동은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임금 노동의 전제 조건이다.
임금 노동을 하려면 그 일에 지원을 하거나 자격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나면서부터 정해지거나 부여되는 것이다. 임금 노동을 하려면 발탁되어야 하지만, 그림자 노동은 배정받는 것이다. 그림자 노동에 들어가는 시간, 노고, 수모에 대해서는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림자 노동은 이런 무보수의 자기 규율성 때문에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임금 노동보다 더 중요성을 띠게 된다. -176p
자급자족을 상대로 한 부르주아 전쟁에서 군중의 지지를 얻어내려면, 걸핏하면 폭동이나 일으키는 평민 군중을 경제적으로 구분된 남성과 여성의 건전한 노동자 계급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계급의 구성원인 남성은 고용주의 음모에 가담한 공범이기도 했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자급자족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자급자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본과 노동은 근본적으로 동맹 관계에 있었지만, 이런 관계는 계급투쟁이라는 제의를 통해 은폐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으로서의 남성은 자신의 임금에 대한 가족의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자신이 사회의 정당한 노동을 모두 책임지고 있으며 비생산적인 여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산업 노동의 상호보완적 형태인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은 이렇게 하여 가족 안에서 가족을 통해 하나로 섞이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자급자족 활동으로부터 사실상 소외된 채 고용주의 이익과 자본의 투자활동에 상대방이 착취되도록 돕는 발판이 되고 말았다. 잉여수익 역시 이른바 '생상수단'에만 투자되던 데서 벗어나, 그림자 노동 자체를 더욱 자본집약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이용되기 시작했다. 주택, 창고, 주방에 대한 투자는 가정에서 자급자족이 사라지고 그림자 노동의 독점이 커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190p
산업사회는 피해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19세기를 거치며 이루어진 인클로저와 지위 박탈로 인해 여성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사회 전반에 대해 혼탁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은 사회에 감상적인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손을 더럽히는 일은 억압받는 피해자의 몫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돌봄'이라는 미명 하에 피해자 스스로 억압의 조력자가 되게끔 강요한다.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을 때 이 사회는 평범한 행복을 느낀다.
이 감상주의는 산업사회의 활동이 부정하는 가치를 오히려 산업사회가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강변한다. 감상주의는 자급자족에 대한 향수를 주물럭거림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대립에 내재되어 있는 분리(apartheid)를 가리는 데 성공한다. 향수가 열망하는 이 '자급자족'이야말로 토박이 영역과는 정반대되는 그림자 경제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여성, 환자, 흑인, 문맹자, 저개발국인, 중독자, 약자,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분리의 피해자를 감상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이미 자신을 굴복시킨 권력에 짐짓 장엄하게 저항하는 척하는 일일 뿐이다. 이런 감상주의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자급자족에 필요한 환경을 스스로 파괴한 사회에서는 자급자족의 대체물을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새로 진단하는 것에 의존해서만 지탱할 수 있다. 이런 가부장적 속임수는 억압받는 자들의 대표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억압을 위한 권력을 추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206p
*인클로저(enclosure) : 근세 초기의 유럽, 특히 영국에서, 영주나 대지주가 목양업이나 대규모 농업을 하기 위하여 미개간지나 공동 방목장과 같은 공유지를 사유지로 만든 일. 15~16세기의 1차 인클로저와 18~19세기의 2차 인클로저로 인하여 중소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 또는 공업 노동자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