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경 (한국)

사회|문학과지성사|2015

★★★★☆




1장. 사람의 개념

노예에게 얼굴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지켜야 할 체면 또는 명예가 없다는 것, 타인을 대함에 있어서 얼굴 유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노예의 얼굴을 고려할 필요가 없음을 뜻한다. 노예는 고프먼이 분석한 '상호작용 의례'―그 핵심은 상대방이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다―에서 제외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타인앞에 현상할 수 없고, 타인은 그의 앞에 현상하지 않는다.

한편, 노예에게 온전한 이름이 없다는 것(그의 이름에는 혈통과 출신지를 표시하는 부분―성family name―이 없다)은 그가 태생적으로 소외된 존재임을 알린다. 그는 출생에서 기인하는 권리들을 주장할 수 없는데, 그러한 주장을 들어주고 인정해줄 친족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 kinless 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 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친정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 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外人',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상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족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나서줄 제삼자가 없다는 것이다. 출가한 여자는 원래 자기가 속해 있던 친족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녀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시집 식구의 손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녀와 노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다. 노예는 아무 명예도 갖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명예가 중요하다. 또 그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시집과 혈연으로 이어지게 되며,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36p


고프먼은 「수용소」에서 재소자의 인격에 가해지는 체계적인 모독의 테크닉을 자세히 기술한 바 있다. 그 자체가 굴욕을 초래하는 입소의 의례들, 사적인 공간과 개인적인 물품들의 박탈, 다양한 형태의 신체적 침범, 신체적·도덕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관행들…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며 그의 자아 이미지를, 나아가 자아 자체를 왜곡시키는 이러한 테크닉들은 모든 종류의 '총체적 시설total installation'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군대도 물론 그 가운데 하나이다. 군대에서 이런 과정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군인들의 인격을 부정하여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43p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사회는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타인이 내게 '현상한다'는 말은 그가 나의 '상호작용의 지평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를 띤다. 동시에 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나 역시 그에게 현상하고 있다는 믿음―우리가 함께 사회 안에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며,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확인해주기를 기대한다. 물론 상대방은 나를 '무시'할 수 있다. 즉 나의 신호에 화답하지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 상호작용의 의례는 언제나 위반과 중단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그 때문에 문화적 코드의 단순한 실행―'국지적 활성화'―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의례의 사슬을 구성하는 행위들 하나하나는 질문이자 요구이며, 초대이자 도전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인정투쟁'의 계기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58p



인정투쟁이라는 단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 거의 자동적으로 결부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타자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자기 보존의 욕구를 극복하고 이 인간적인 욕구를 따를 때, 즉 타자의 인정을 위해 생명을 걸때 비로소 자신을 인간으로 확증한다. 이러한 생사를 건 위신투쟁이 없었다면 역사가 개시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인간적 현실이 인정된 현실로 구성되기 위해서, 최초의 두 인간 중 한 명은 타자에 의해서 인정받지 않은 타자를 인정해야 한다. 즉 인간은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주인이거나 노예이다. 하지만 여기서 변증법이 시작된다.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지만, 그가 획득한 인정은 그에게 무가치한 것이다. 그의 욕구는 그가 인정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인정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노예는 타자(주인)를 인정한다. 따라서 상호 인정이 발생하기 위해서 노예는 단지 스스로를 이 타자에게 강요해서 그로부터 승인받기만 하면 된다. 주인은 노동하도록 노예를 강요한다. 그러나 노동하는 과정에서 노예는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노예는 이제 자신의 노동에 의해 변화된 기술적 세계에서 군림한다. 노예는 세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와 더불어 해방투쟁을 위한 새로운 객관적 조건들을 창조해낸다. -59p



3장. 사람의 연기/수행

고프먼의 인용을 통해 알려진, 로버트 파크의 유명한 문장 속에서 "사람person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의미가 가면mask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어느정도 의식적으로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우리가 서로를 아는 것은 이 역할들 속에서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또한 이 역할들 속에서이다." 이어서 그는 가면이 우리의 인격의 일부이며 우리는 가면을 씀으로써, 즉 어떤 역할 또는 성격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가면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우리가 수행하려고 애쓰는 역할―을 대표하는 한, 이 가면은 우리의 더 진실한 자아, 우리가 되고자 하는 자아이다. 결국, 우리의 역할에 대한 관념은 제2의 자연이자 우리 인격의 통합적인 부분이 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이 세상에 와서 성격을 구축하며 사람이 된다."

가면이 우리가 연기하고자 하는 성격과 관련된다면, 얼굴은 그 가면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연기자로서의 우리의 주체성과 관련된다. 나는 지금 가면의 뒤에 연기되지 않은 진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연기하며, 심지어 일기를 쓸 때도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자신이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다. 가면의 뒤에―즉 얼굴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 아니라, 신성한 것 또는 명예이다.

얼굴이 있다는 것은 명예가 있다는 말과 같다. 체면을 잃는다거나 체면을 살린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일상어에서 얼굴은 명예와 같은 뜻으로 쓰이곤 한다. 명예는 개개의 인간 존재를 가상의 구로 둘러싸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게 만든다. 고프먼은 짐멜을 인용한다. "이 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찌그러져 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지만, 개인의 인격성의 가치가 파괴되지 않는 한 침투 불가능하다. 한 사람이 지닌 '명예'가 그의 둘레에 이런 종류의 구를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의 명예에 모욕이 가해졌을 때 사용되는 '너무 가까이 갔다'는 표현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이 구의 반지름은 침범하면 그 사람의 명예에 대한 모욕이 되는, 타인과의 거리를 표시한다. -88p



4장. 모욕의 의미

개인 individual

특정한

인간

개별화 

사람 person

보편적

인격 - 집단적 마나의 할당

사회화

상호작용 의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 / 공동체에서의 성원권을 인정

도덕적 의무

도덕적 권리


이는 사람들이 왜 때로는 물질적인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보다 사소한 의례상의 위반에 더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한다. 정의에 대한 모든 요구는 성원권의 확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성원권을 위협하는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 자신에게 의례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데도 거기에 항의하지 못하고 매번 참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적인 열등성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 우리는 공동체에서의 그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고, 또는 그의 성원권이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111p



<배제와 낙인의 공간 구조> -126p

물리적 장소이자

현상공간으로서의 사회





총체적 시설 


정상인들


조건부 수용

적응하는

배제

적응하지 못하는 

(잠재적) 불명예의 관리

명예의 상실 



체벌당하는 사람이 순순히 체벌에 협조하지 않을 때, 폭력은 점점 강도를 높이며 일종의 광기를 띠게 된다. 체벌하는 사람―그는 보통 지배 문화의 편에 서 있다―은 이런 상황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체벌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과 명예로써 체벌에 맞서는 한, 누가 누구를 모욕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굴종의 몸짓을 내보일 때, 즉 체벌이 의례로서 완성될 때 비로소 상황의 의미가 확장된다. 그는 의례적 질서를 위반한 것이고, 상대방의 권위를, 나아가 인격을 모독한 것이다. 반면 상대방이 그를 때린 것, 그의 신체와 정신을 침범한 것은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훈육'으로 재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벌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게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2p



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실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160p



5장. 우정의 조건

한국 사회는 B(실직이나 파산 등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와 같은 사람들의 문제를 두 가지 방법으로 처리해왔다. 하나는 그들을 특수한 범주로 분류하여 관리하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시설에 수용하거나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 경우 관리 대상이 된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받는 입장에 놓이며, 그 결과 자기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그러한 활동을 외부에서 지원하는 사람들보다 '낮은' 위치로 떨어진다. 그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적절한 무대장치와 함께, 연기를 중단하고 들어가 쉴 수 있는 무대 뒤의 공간이 필요하다. 예고 없이 빈민가를 방문하여 '봉사 활동'을 하는 유명 인사들은 시혜의 대상이 된 빈민에게 원치 않은 노출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 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

한국 사회는 B와 같은 사람들을 일차적으로 A(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인격적 관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의 위치로 옮겨놓으려 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만 공적부조 시스템을 가동한다. 우리는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라는 말로 이러한 시스템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국가는 사회의 기초가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가족을 부양자와 피부양자, 대표자(호주)와 나머지 구성원으로 나눈다. '경제'와 '정치'에 접속되어 있는 사람(돈을 벌어오고 신문을 읽는 사람)은 전자, 즉 부양자-대표자이다. 후자 여기 소비자이자 유권자로서  경제와 정치에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수동적인 성격을 띤다. 가부장제의 문제점은 피부양자-비대표자가 부양자-대표자에게 쉽게 인격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이다. -183p



6장. 절대적 환대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authorship 자체임을 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 내용("나는 레즈비언이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운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지 못했더라도 그저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인정을 표현할 수 있다("네가 레즈비언인이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215p



유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일종의 채무 관계로 규정한다. 부모는 자식을 길러주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낳아주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생명이라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이다. 부모는 이 빚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식 역시 기억하기를 바란다. 효의 관념은 바로 이러한 소망의 반영이다. …이러한 효는 충과 연결되어 있다. 유교적 가산제patrimonialism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투영한다.

…결국 신체공양 의례가 제기하는 문제는 중국인(혹은 한국인)의 야만적인 습속에 관한 것도 아니고, 유별나게 잔인한 심성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사회가 성원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물론 그들과 노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은 사람이다. 노예에게는 아무런 명예가 없지만, 그들은 명예를 지니며 명예를 추구한다. 노예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람의 지위를 포기한다. 반면 효자와 충신은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하지만 이 차이들은 어떤 역설에 의해서 희미해진다. 유교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다움을 증명하는 한에서, 조건부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인격은 지속적인 시험 아래 놓이며, 언제나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이 모든 비난의 가능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죽음으로써 이 시험을 통과했을 때뿐이다. 유교 국가는 '효에 죽은' 자식과 '충에 죽은' 신하를 기리기 위해 비와 문을 세운다. 이 비와 문은 사회 안에 있는 그들의 자리를 표시한다. 그들은 비록 몸을 잃었지만, 그 덕택에 누구보다 확고한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225p



7장. 신성한 것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임을 뜻한다. 사회는 산 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다. '시계의 시간', 즉 일상의 산문적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지낸다. 하지만 축제와 기념일은 동질적인 시간의 흐름을 폭파하고, 기억의 시곗바늘을 매번 같은 자리로 돌려놓아,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다. 축제와 애도의 의례가 어딘가 닮아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축제에는 죽을 자들도 초대된다. 산 자들이 퍼레이드를 벌일 때, 죽은 자들 또한 그 대열 속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256p




*타이모크라시(timocracy) : 올란드 패터슨이 플라톤을 따라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라고 부른 것 (=금권정치)

*스티그마(stigma) : 낙인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노예나 범죄자의 몸에 칼이나 불에 달군 쇠로 불명예의 표지를 새겨넣는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

*캘빈주의(Calvinism) : 종교개혁가 캘빈에게서 나와 개혁파 교회의 조직으로 발전한 신학 사상을으로, 성서를 권위로 하는 복음주의이지만 특히 예정;predestination의 신앙을 그 특색으로 한다. 이것은 어떤 자만이 신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해서 태초에 이미 선택되어, 영원한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예정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인용도서 메모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루쉰 「아Q정전·광인일기」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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