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독일)

소설|문학동네|2010

*Der Prozess

★★★★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9p



반면에 아주 특기할 만한 것은, 피고인의 경우에는 거의 누구나, 아주 소박한 성품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일단 소송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때부터 개선을 위한 제안들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다른 일에 쓰면 훨씬 유용할 시간과 정력을 공연히 이런 일에 허비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길은 주어진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혹시 세세한 부분이 개선될 수 있다 하더라도, 물론 이런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앞으로 있을 소송들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늘 보복할 기회를 찾고 있는 관리들의 각별한 주목을 끌게 되어 본인 자신은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주의를 끌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비위에 거슬리는 터무니없는 일이 있더라도 조용히 있어야 한다!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한 부유(浮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그것은 자기 발아래에 있는 지반을 없애는 행위와 같아서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고, 그 거대한 조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148p



신부가 말했다. "법의 서문에는 그런 기만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법 앞에서」 비유담 생략)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볼 때 문지기가 내부의 모습이나 의미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과 관련해 기만을 당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런데 그가 시골 남자에 대해서도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골 남자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골 남자를 자기보다 낮은 사람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여러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시골 남자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 매여 있는 사람보다는 우월하니까요. 그런데 자유로운 사람은 사실 시골 남자입니다. 그는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다만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금지당하고 있을 뿐인데, 그것도 단 한 사람, 즉 문지기에 의해서만 금지당하는 것이지요. 시골 남자가 문 옆에 놓인 걸상에 앉아 평생을 거기 머물러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는 없습니다. 반면에 문지기는 직무 때문에 자기 자리에 매여 있는 처지이고 자리를 벗어나 외부로 나갈 수가 없으며, 또 보아하니 그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내부로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외에도 그가 비록 법에 봉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은 그 입구를 위해, 그러니까 그 입구로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는 그 남자만을 위해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그는 시골 남자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점에 대해 문지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은 하나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의견에 따르면, 문지기는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훨씬 더 심각한 기만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맨 마지막에 그는 입구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제는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라고 말하는데, 처음 부분에는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그 문이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 문으로 들어가도록 지정된 남자의 생존 기간과는 무관하게 항상 열려 있는 것이라면, 문지기 역시 그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를 들어 문지기가 문을 닫겠다고 한 것은 단지 대답을 준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 그것은 직무상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는 의견, 또는 시골 남자를 마지막 순간에 후회와 슬픔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견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도 그 문을 닫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문지기가 적어도 끝 부분에서는 지식에 있어서도 시골 남자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다고까지 여깁니다. 왜냐하면 시골 남자는 법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를 보고 있는 반면에 문지기는 아마도 문을 등지고 서 있을 것이며, 그가 무슨 변화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확인해줄 만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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