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체코)
소설|민음사|2009
*L'insoutenable legerete de l'etre
★★★★☆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12p
꿈의 초반부터 또 다른 공포도 있었다. 모든 여자들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다니! 자신들의 육체가 한결같이 평가절하되고 영혼 없는 단순하고 동일한 음향 기계가 되었을 따름인데 설상가상으로 그런 사실을 즐겨야 하다니! 그것은 영혼 없는 자들의 , 환호에 찬 유대감이었다. 개성에 대한 환상이자 우스꽝스러운 오만인 영혼의 짐을 내던지고 모두가 비슷해졌다는 점에 대해 그들은 행복해했다. 테레자는 그녀들과 더불어 노래를 했지만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노래를 한 것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에게 살해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마시가 그들을 총으로 죽이는 것과 그들이 차례로 죽어 수영장에 빠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철저하게 비슷하고 무차별화된 것을 즐거워하는 여자들은 그들의 유사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미래의 죽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권총 소리는 죽음의 행진을 행복하게 마무리 할 따름인 셈이다. 총 소리가 날 때마다 그들은 쾌활하게 웃었고 시체가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더욱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왜 총을 쏘는 사람이 토마시였고, 왜 그는 테레자를 쏘려고 했을까?
테레자를 여자들 가운데로 보낸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테레자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꿈을 통해 토마시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것잉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런데 이제 토마시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모든 여자에게 키스했고 같은 식으로 애무했으며 테레자의 육체와 어떤 구별도, 정말 추호의 구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벗어났다고 믿었던 세계로 그녀를 되돌려 보낸 셈이다. 그는 다른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행진하라고 그녀를 내몰았던 것이다. -102p
현기증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106p
빛과 어둠
사비나에게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시야는 두 경계선에 의해 제한된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빛과 완전한 어둠. 아마도 모든 극단주의에 대한 그녀의 혐오감은 이런 데서 연유할 것이다. 극단적인 것은 그것을 넘어서면 생명이 끝나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정치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 극단주의에 대한 열정은 죽음에 대한 위장된 욕망이다.
프란츠에게 빛이라는 단어는 부드러운 햇살이 감싸는 풍경의 이미지가 아니라 빛 그 자체, 태양, 전구, 영사기 같은 빛의 원천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익히 들어 오던 은유를 떠올렸다. 진리의 태양, 이성의 눈부신 광채 등등.
그는 빛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요새는 정사를 위해 불을 끄는 것은 웃기는 짓으로 통한다. 이것을 아는 그는 침대 머리에 조그만 램프를 켜 두었다. 하지만 사비나의 몸에 진입하는 순간 그는 눈을 감는다. 그를 사로잡는 관능이 어둠을 예고했던 것이다. 이 어둠은 순수하고 총체적이다. 이 어둠에는 이미지도 환영도 없으며, 끝도 경계선도 없다. 이 어둠은 우리들 각자가 내면에 품고 있는 무한성이다. (그렇다. 무한한 것을 찾고자 하는 자는 눈만 감으면 된다!)
쾌락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프란츠는 온몸을 활짝 펼치고 그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그 자신이 영원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내면 어둠 속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외양은 점점 위축되는 법이다. 눈을 감은 남자는 자기 자신을 폐기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그래서 사비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 자기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이런 어둠은 무한성이 아니라 다만 그녀가 보는 것과의 불화, 보이는 것에 대한 부정, 보는 것의 거부만을 의미했다. -160p
그렇다면 테레자와 그녀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녀의 육체는 테레자라는 이름에 대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육체에 이런 권리가 없다면, 그 이름은 무엇과 관계되는 것일까? 오로지 비육체적이며 비물질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테레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226p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321p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358p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일.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잉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392p
-7-
십여 년 후 그녀의 친구의 친구인 미국 상원의원이 커다란 자동차로 그녀에게 관광을 시켜 주었다. 아이들 넷이 뒷자리에 끼여 앉아 있었다. 상원의원이 차를 세우자, 아이들은 차에서 내려 커다란 잔디밭을 달려 체육관 건물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인공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상원의원은 운전석에 앉아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가는 네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애들을 봐요." 그가 손으로 둥그렇게 그리는 원 안에는 체육관, 잔디밭,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저런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는 어린아이, 부쩍부쩍 자라는 잔디밭을 보며 내뱉는 기쁨의 표현만이 아니라, 풀도 자라지 않고 아이들도 뛰지 않는다고 상원의원이 확신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여자에 대한 동정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비나는 프라하 광장의 연단에 서 있는 이 상원의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얼굴은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이 높은 연단에서, 그들의 발 아래로 행진하며 판에 박힌 듯한 미소를 짓는 시민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8-
어떻게 이 상원의원은 어린아이들이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의 영혼을 읽었을까? 만약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 중 세 명이 한 아이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면?
상원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의 감수성.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물론 키치가 유발한 느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키치는 유별난 짓을 할 수 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402p
캄보디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품에 노란 아기를 안은 미국 여배우의 커다란 사진 한 장.
토마시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碑文)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
베토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Es muss sein!"이라고 말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에 침을훈 표정을 한 남자.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4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