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한국)

철학|미다스북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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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식과 실존

(1) 시와 인식

예술의 근본 기능은 비은폐성aletheia, 즉 진리에 있다. 예술작품은 어떤 객관적 사실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인식적 기능을 한다.

언어를 통해서 필연적으로 의미의, 관념의 세계를 만들 때 의미 이전의 사물로서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도는 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일상 언어의 파괴성, 즉 일상 언어가 갖고 있는 개념성을 지양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입증될 수 있을 것 같다.


(2) 인식과 존재―지칭의 관점에서 : 논리적+인과적 입장을 상호보완적으로,

인식이란 진술과 관련하여 있는 개념이지만 모든 진술이 인식은 아니다. 오직 그 진술이 그것을 지칭하는 대상과 상응한다고 전제되었을 때에만 그것은 비로소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해서 참된 진술만이 인식이며, '참이다'라는 말은 한 진술과 그것이 지칭한다고 전제되는 대상이 서로 상응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의 진술은 그것의 지칭대상과 상응관계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언어 이전, 즉 진술 이전의 사물의 형상 자체, 즉 진술대상에 직접 접촉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진술과 그것의 지칭대상과의 상응관계가 될 수 없으며, 무엇을 안다는 말은 그 무엇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드러내는 것, 서술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앎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칭매체인 진술 자체에 불과하게 된다.

언어를 벗어나 존재를 얘기하고자 하는 인식의 운명은 제임슨의 표현대로 「언어의 감옥」 속에 갇힌 채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마련이다.

⇒ 언어주의lingualism

 

(하이데거의 '존재에 대한 전이해Vorverstandnis vom Sein'와 브라운 그리고 레이코프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음을 뜻하는 자기모순의 반복)


(3) 인문과학과 해석학 : 현상학+구조주의

인문과학의 해석에 대한 고찰은 그 과학이 지향하는 이상적 앎이 절대적인 것, 즉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그러한 진리는 논리적으로 보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현상학 이해와 구조적 설명이 변증법적 발전이란 주장은 해석이 어떤 절대적 진리 발굴에 접근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즉 해석interpretation해야만한다면, 그러한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 즉 절대적인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푼다는 것, 해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원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원시적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무한한 해석의 해석의 또 해석이란 시시포스나 페넬로페 같은 운명에 처해 있게 마련일 것이다.


(4) 인식상대주의

가장 객관적인 앎이라고 공인되어온 자연과학적 앎도 결국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적·언어적·인위적 테두리에 의해서 변형되고 조정되었다고 봐야 한다. 자연과학에 있어서까지 우리들은 패러다임의 포로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상대주의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요약된다. 사물현상이 어떤 것이냐 하는 인식의 문제는 언어에 의존되었기 때문에 언어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존재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로 흡수된다. 개념의 체계 혹은 거미줄은 한 언어권, 더 협소하게는 한 문화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뭉치며, 그것은 곧 그 언어권, 그 문화권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 어떤 개별적인 사물현상에 대한 하나의 진술의 진리는 그것이 진술하는 사물에 비추어 결정될 수 없고, 한 문화권, 한 사회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 즉 믿음의 체계에 비추어 판단된다. 이처럼 진리는 언제나 언어적인 것, 언어 이전의, 개념화 이전의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필연적으로 굿맨의 낱말을 빌려 쓰자면, 그러한 사물 자체는 '언어판version'에만 관련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식은 언어 밖으로 해방될 수 없고 언제나 언어 속에 갇혀 있다. 이쯤 되면 진술이 비교되는 기준으로서의 진리라는 개념은 그 뜻을 잃게 된다. 굿맨의 말대로 진리는 일종의 관습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상대주의가 존재를 인식에 흡수해서 오로지 우리가 있다고 믿는, 인식된 것만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존재는 언어로 진술된 그것 자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존재와 인식과의 연속적이며, 동시에 절단적인 양면의 관계를 착각하고 오로지 인식적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절단된 상황에서만 존재와 인식을 바라보는 혼란·오류를 범한 데에 기인한다. 인식의 문제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 논리적으로만 검토될 수 있는 진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들의 진술의 대상, 즉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상대주의는 이러한 관계를 의식하고 그러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한에서 그 의미와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들의 앎은 언어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대적이라 하겠지만, 그러한 지식의 상대주의는 일정한 언어에 의해서 처음부터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처럼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사물현상 자체에 언제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5) 언어와 체계

니체는 언어와 존재가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 존재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오로지 언어의 틀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언어의 제약을 거절할 때 우리는 생각을 멈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이 만든 세계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진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니체의 관점주의는 일종의 관념주의로 인간의 의식을 떠난 독립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다. 니체에 의하면 의식 자체도 언어를 떠나선 생각할 수 없는데, 모든 언어는 서로 다를 수 있고, 사실 다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보편적인 인식의 장치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언어 장치에 의해서 사물현상을 대하느냐에 따라 사물은 서로 달리 인식되게 마련이다. 세계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식 장치는 백지 같은 의식이란 거울도 아니며, 선험적 범주란 인류 보편적인 의식의 구조도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언어, 더 정확히 말해서 언어체계를 따름에 불과하다. 따라서 어떤 언어체계로써 세계를 보느냐에 따라 세계는 달라질 수밖에 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관점주의의 의미는 더 확실해진닫. 바꿔 말해서 세계는 어떤 언어체계를 택하느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도덕적 현상이란 것은 없다. 오직 도덕적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선'과 '악'이 마치 하나의 객관적 현상으로 흔히 오해되어 왔다. 선이나 악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어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가리키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을 물질의 사물화라고 흔히 부른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들은 언어라는 것에 현혹되어 일종의 환상적 세계를 믿고 살아간다. 우리들은 언어화된 세계, 즉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상징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를 서로 뒤범벅해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상징의 세계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반드시 사물의 세계와 뒤범벅될 때, 다시 한 번 우리들이 과거에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2부. 시와 과학

(1) 시와 과학

현상학자 후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식은 지향성intentionality을 갖게 마련인데, 이러한 의식과 그것이 지향하는 어떤 관계는 존재차원과 의미차원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 범주를 통해서 설명된다. (존재차원 : 생물학 또는 물리학적 현상 / 의미차원 : 관념idea의 차원)


진리는 어떤 대상에 있지 않고 그 대상을 서술하는 말의 의미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그 대상과 대상을 서술하는 말의 관계 속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존재에도 의미에도 속하지 않는 오로지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메타 개념이다.


쿤은 구성 요소의 의미를 결정하는 전체적 관점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어떤 개개의 구체적인 현상을 보는 하나의 관점, 하나의 패턴이다. 예를 들자면, 전기는 보는 관점에 따라 파동 현상으로 보는 경우와 미립자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바꿔 말해서 어떤 이론적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즉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현상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 즉 파동 혹은 미립자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쿤은 강조하기를 패러다임은 우리가 보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패러다임이 존재에 앞선다는 결론에 끌려가게 된다. 뉴턴의 이론을 선택하느냐 혹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즉 우리가 선택하는 '패러다임'에 따라서 같은 말로 쓰인 '시간'이나 '물질'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쿤에 의하면 뉴턴의 이론에서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변천하는 것은 후자가 전자에서부터 발전한 것이 아니라, 전자가 완전히 후자에 의해 대치된 것이다. 과학은 점차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속적인 혁명에 의해서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패러다임이 버려진 대신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채택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패러다임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인위적 의미의 체계라는 것이다. 만약 과학에 있어서 같은 사실을 인위적으로 만든 체계에 따라 A로 볼 수도 있고 B로 볼 수도 있다면 과학적 지식, 즉 과학적 진리는 상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과학적 진리도 절대적 객관성을 갖지못한다. 그 말은 과학적 진리가 결국 칸트적 의미로서 주관적임을 의미한다. 과학이 서술해 보이는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 보이는 사물이다.


의식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정복해서 물질적 욕망을 채워주는 데 이바지하고 있지만, 그와 정비례해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만다. 지성에 의해서 자연은 차츰 추상화, 즉 개념화됨으로써, 다시 말해 자연 아닌 의미가 됨으로써 파악된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자연의 추상화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살아 있는 인간, 즉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동시에 즉자와 대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 욕망과 배치된다. 의식의 발달에 따라 자연으로부터, 우주 전체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불행을 느끼고,그로 인해 의식발달 이전의 존재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이런 욕망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 욕망, 즉 모든된 욕망이다.

이러한 인간 욕망의 모순은 시적 경험, 즉 시적 의식 속에서 다소간 잠정적 타협이나 해결을 시도한다. 어떻게 보면 시적 의식은 거의 의미를 나타낼 수 없는 존재에 속하고, 또 어떻게 보면 거의 그냥 대상으로는 볼 수 없는 의미를 갖는 의식에 속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시적 세계는 한편으로 존재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존재이며, 또 한편으로는 의미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시의 세계는 의식의 대상도, 의식 그 자체도 아닌 애매한 세계다.

시의 의도는 언어 없는 경험을 얻는 데 있으며,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것을 언어로 표현코자 함에 있다. 이와 같은 모순된 시적 의도가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상태는 잠들 떄의 꿈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사고할 때의 투며안 의식도 아닌 일종의 명상의 경지일 뿐이다.

그것은 대상과 의식이, 인간과 자연이, 주체와 객체가, 즉자와 대자가, 너와 내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용해·융화된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세계이다. 인간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비극적 삶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잠시나마 가장 근본적인 바슐라르의 말대로 '휴식repos'과 '행복benheur'을 경험하게 된다.


(8) 현상학으로서의 문학비평

문학비평의 본질이 체계적인 작품의 이해에 있다고 말하지만, '이해'라는 개념에는 두 가지 다른 뜻이 있다.

- 설명explanation : 한 개별적인 현상이나 사실이 한층 높은 차원에 있다고 가정된, 보다 일반적인 원리나 원칙에 의해서 연역됨이 논리적으로 밝혀질 때 그 현상이나 사실은 설명됐다고 본다. ex) 사과가 떨어지는 구체적인 현상이 만유인력이라는 원리, 즉 자연법으로부터 연역, 7+5=12라는 사실이 수학법칙에서부터 연역

- 해명elucidation : 어떤 내재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일 ex) 컴컴한 방이 밝아졌을 때, 확실치 않았던 역사적 고증이 고분의 발굴이라든가 전문가에 의한 해설에 의해서 밝혀졌을 때


문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도, 어떠한 사상도 아니다. 그것은 이론이나 사상을 벗어난, 아니 그 이전에 가장 직접적으로 아무런 선입감도 없이 피부로 체험된 대상 혹은 세계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종류의 경험을 순수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철학에서 말하는 현상학이란 순수인식을 체계적으로 밝혀보자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상학이 체계적으로 밝혀내려는 대상이나 세계는 문학을 통해서 작가가 제시하고자하는 대상이나 세계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상학은 존재에 대한 학설로서 현상학과 다만 철학적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의미로서의 현상학은 현상학을 창조한 후설의 현상학이다. 후설은 가설에 입각한 불확실한 지식을 극복하고, 확고부동한 명증을 가질 수 있는 지식을 얻으려 했다. 그는 그 방법으로 이른바 '판단중단epoche'과 '현상학적 환원'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모든 지식을 일단 의문에 붙여보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현상을 차근차근 천천히 검토함으로써,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정말로 직접 제시된 그대로의 대상을 밝혀내려 했다. 그는 그 대상이 반드시 하나의 '본질eidos'을 갖고 있다고 믿었고, 그 본질은 보편적이며 관념적인 것, 즉 플라톤적인 이데아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후설의 현상학에 반해서 후자의 의미로서의 현상학은 후설에서 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학설을 떼어버리고 난 방법만으로서의 현상학이다. 방법으로서의 현상학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지각에 있어서, 혹은 예술적 경험에 있어서, 혹은 사회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시초적인 의식과 그것의 대상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가장 시초적으로 얻어진 경험대상의 내용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의 대상을 '설명'함으로써 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해명'함으로써 이해하자는 것이다. 이 해명하는 과정을 현상학에서는 '현상학적 기술'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해명은 잠재적인 것을 가려내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제시해보도록 하는 과정이다.



3부. 이성의 시련

(1) 이성 = 질서/구조/형태 +) 혼돈이 아닌 가지적/질서적/구조적/형태적 투명성

이성이란 다름 아닌 형이상학적 존재 근거로서의 '이데아'이다. 실체는 이데아이며 이데아는 곧 실체이다. 이처럼 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를 지칭한다.

철학사를 통해서 이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장 선명하게 정의한 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나'이다. 데카르트는 직관적 진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가장 기본적 명제를 근거로 모든 존재를 '사유적 존재'와 '공간적 존재', 물리적 현상을 초월한 정신적 존재와 현상 자체인 물질적 존재로 형이상학적 구별을 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의심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나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코기토, 즉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그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진리인 동시에 '나' 이외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진리의 원천이며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코기토는 진리 인식의 주체로서의 이성이고, 그 이성은 존재의 '빛'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빛/이성이 모든 자연적 존재를 밝히는 빛이라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 시대와 사회,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초월하는 존재이며, 경험적 '개별자'가 아니라 초월적 존재로서의 영원불변한 '보편자'이고, 다수가 아니라 오직 하나이다.


이성은 인식론적으로는 존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라는 점에서 선험적이로, 존재론적으로 그 인식 기능에 환원될 수 앖다는 점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한다.


- 질서/구조/형태로서의 이성 : 사물 자체는 그것이 어떤 질서/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지, 그 질서/구조는 그 자체가 이성일 수 없고 오로지 그것이 어떤 인식 주체에 의해서 질서/구조로서 파악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자연/ 우주의 속성이기 전에 인식 주체의 속성일 뿐이다.

- 이성의 역동성 : 역동적 힘/기능/활동/에너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들에 적응과 도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역동적으로 부단히 재구성된다.

- 이성의 탈개념성 : 궁극적 실체는 개념의 틀 속에서가 아니라 개념 이전의 직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 생태학적 이성 : 우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무엇무엇이라는 물질과 그것들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 서로 단절된 채 무엇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완전히 구별될 수 없는 존재의 인위적 분절과 구별의 개념적 산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 자기반성적/자기초월적 에너지로서의 이성



4부. 철학과 시

(1) 시와 철학

존재와 언어의 근본적 구조는 존재를 의식·인식·표상하고자 하는, 즉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시나 철학의 기획은 그 자체 속에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구조적 모순·갈등·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는 그것이 표상하는 존재와 다른 것으로 구별될 때에만 성립된다는 데 첫째의 역설이 있다. '나무'나 '사랑'이라는 어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실재하는 나무라는 사물과 사랑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나 '사랑'이라는 말들은 그것들이 각기 나무나 사랑이 아닐 때에만, 즉 나무와사랑과동일하지 않을 때에만 나무와 사랑을 표상, 즉 의미한다는 역설을 낳는다. 둘째의 역설은 이렇다. 의식, 인식, 표상이 구체적 존재의 '의미화', 즉 관념적 '추상화'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투명하다면, 어떤 존재에 대한 진리의 발견과 그것의 표상은 그것의 추상화와 변형화,즉 그 존재 자체가 멀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성공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3) 시적 지향―사르트르적 가설

사르트르는 존재를 두 가지 양태로 분류한다. '즉자 존재'와 '대자 존재'다. 단순히 있는 것이 즉자라면 그처럼 자족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 대자다. 전자가 동물들을 포함해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반면에 후자는 의식적인 한에서 인간만을 가리킨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사람이라는 말은 의식적이라는 말이며 좀더 정확히 말해, 무엇을 의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의식은 지향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항상 자기와는 다른 외부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두 존재는 존재론적으로는 별개 존재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떼어놓을 수 없다. 대자는 즉자를 전제하고서야 비로서 인식 가능하며, 즉자 역시 대자 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만일에 대자가 그것이 지닌 존재론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즉자를 요구한다면, 즉자는 대자에 의하여 생각되지 않는 한 현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미학적 조망은 의식과도, 그 대상과도 다른 것이다. 곧 사물과도, 사물의 개념과도 다르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다 같이 매우 모호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시가 그같은모호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과 아울러 시적 언어의 기능은 바로 그런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게 이해할 때 시 속의 낱말들과 문장들은 다만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상-의미라는 묘한 복합체로 존재한다. 시는 의식과 그 대상 사이, 인간과 세계 사이를 원초적으로 맺어준다. 이 연결은 내가 존재론적인 조망과 의미론적인 조망에 대비해서 '미학적 조망'이라고 말할 때 뜻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존재론적 조망과 의미론적 조망의 뒤틀린 관계를 가리킨다. 시 속의 낱말과 문장들은 의식의 눈앞에 대상을 객관적으로 나타내거나 표상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기능은 가능한 한 인간과 세계, 즉자와 대자, 곧 대상과 그것의 개념 가운데 가로놓인 존재론적 조망과 의미론적 조망 사이의 틈을 좁히고 메우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시어의 목적은 스스로를 미학적 조망으로 짜는 것이다.



*파토스(Pathos) : 니체가 생성적 존재, 즉 힘에의 의지에 부여한 명칭으로 힘에의 의지가 의지 작용이자 충동 작용이며 아펙트라는 것, 그리고 힘에의 의지의 활동은 경험적 사실이라는 것을 기존의 철학적 용어는 적합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니체로 하여금 파토스라는 용어를 선택하게 하였다.

*레종데트르(Raison d'être) : 사유 법칙의 하나로 충족 이유율, '우리는 왜 이렇게 되고 다르게 되지 않았는가라는 충분한 이유가 없다면, 어떠한 사실도 참이라는 것 혹은 존재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어떠한 명제도 진리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원리이다.

*로고스(logos) : 그리스 철학에서, 언어를 매체로 하여 표현되는 이성. 또는 그 이성의 자유. ↔ 미토스(myth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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