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독일)

소설|현대문학|2013

★★




[토니오 크뢰거]

아까 언어에 인간을 구원하는 기능이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차갑게 식혀 얼음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겠소? 솔직히 말해, 문학어라는 명목으로 인간 감정을 그렇게 신속하고 피상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은 공분을 일으킬 정도로 외람되고 냉정한 행위요. 만일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오르면 당신은 감미롭거나 고상한 경험에 빠져 있다고 느낄 거요. 그러면 글쟁이한테 찾아가 봐요! 아주 간단하게 처리해 줄 테니. 최단 시간에 모든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거요. 글쟁이는 당신의 감정을 분석하고 양식화하고, 이름 붙이고, 자기 의견을 밝히고, 말로 명확히 표현할 거요. 그런 다음 이 모든 것이 영구히 처리되었다고 판정하고 감사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할 거요. 당신 역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냉정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면서, 방금 전까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달콤한 소란에 빠져 혼란스러워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오. 이런데도 허영심에 찬 그 냉정한 돌팔이 편을 들겠소? 그 돌팔이의 신조가 뭔지 알아요? 말로 표현된 것은 해결되었다는 거요. 그럼 온 세상을 말로 다 표현해 내면세계의 모든 문제도 해결되고 구원받고 처리된 거요… 얼마나 좋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그러나 지식, 혹은 해체하고 저지하는 인식을 초월한 도덕적 단호함이란 결국 세계와 영혼의 도덕적 단순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악한 것과 금지된 것,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것의 강화를 의미하지 않을까? 그리고 형식에는 두 얼굴이 있지 않을까? 도덕적인 면과 비도덕적인 면 말이다. 그러니까 형식은 기율의 결과와 표현으로서는 도덕적이지만, 태생적으로 도덕에 대한 무관심을 내포하고, 본질적으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도도하게 휘두르며 도덕적인 것을 찍어 누르려 한다는 점에서는 비도덕적, 아니 반도덕적이지 않을까?



[어릿광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태도로 사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다. 나도 그걸 알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로 살 수 없고, 남들과 다른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나를 파멸시킨 것은 순진무구함으로 가득 찬 양심의 가책이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란 결국 속으로 곪아 가는 허영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세상에는 한 가지 불행만 있다. 자신에 대해 애정을 상실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이 더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 그동안 나는 그것을 얼마나 또렷이 느껴 왔던가! 그 밖에 모든 것은 삶의 유희이자 다채로움이다. 다른 고통에서는 아주 훌륭하게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고, 아주 멋지게 자신을 예외로 만들 수 있다. 너 자신을 한심하고 역겨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너 자신과의 불화이자, 고통스러운 양심의 가책이자, 허영심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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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YOUN 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