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한국)
에세이|난다|2013
★★★★
[몽유도원도 관람기]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관람은 일종의 순례 행렬이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레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광장에 구절양장을 그린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덮어 가리기와 백사마을]
청개천 복개는 내가 '덮어 가리기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의 전형적인 예이다. 박정희 이후 오랫동안 우리의 근대화는 눈앞에 문젯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올곧게 해결하기보다는 덮어서 보이지 않게 했으며,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지는 삶은 그것이 성장하고 개화하기를 돕고 기다리기보다는 시선이 닿지 않는곳으로 몰아냈다. 이명박 시장 시절에 덮었던 청계천을 다시 열었지만,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개천의 양안과 바닥을 시멘트로 덮어 단장하고 수돗물로 냇물을 연출하게 하였으며, 시민들의 삶과 깊이 연결된 복잡한 가게들을 멀리 내보냈으니, 조금 세련된 '덮어 가리기'에 불과하다. 오세훈 시장 시절의 디자인 서울에 이르게 되면, 요즘의 말투를 빌려 '후기 덮어 가리기'나 '포스트 덮어 가리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실로 적절하겠다.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필경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환경이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저와 이웃의 행복을 가꾸어가는 터전이다. 물론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이 정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살아온 역사도 우리의 민주적 의지를 제약하고, 여러가지 물질적 조건도 우리를 가로막는다. 우리 개개인의 민주적 자질이 충분히 성숙한 것도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격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어디에서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적은 없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경지에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폭력에 대한 관심]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160킬로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금지된 시간의 알레고리]
그러나 질책과 다그침으로 감추어진 어떤 힘을 지금 이 자리에 불러올 수는 있어도, 그 힘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라도 지금 이 자리에 구속되는 힘은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힘의 자리는 시간이다. 저 금지된 시간의 알레고리는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시간의 알레고리이다. 모든 예술적 전위의 다그침은 역사적 시간의 파괴가 아니라 그 믿음을 가장 날카롭게 곤두세워 믿어야 할 시간과 자기 사이에 어떤 운명의 장치를 만드는 일이다. 만해선사는 그 점에서 전위였다. 선사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임과의 이별을 말함으로써 저 감추어진 힘과 지금 이 자리의 자기 사이에 인연이라는 운명의 장치를 설정하였다.
*키치(Kitch)하다 : 오늘날 키치는 단지 미적으로 저급하거나 조악한,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특수한 장르화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문화 일반, 나아가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리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