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한국)
소설|문학동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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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공기중으로 휘발되는 알코올처럼 내 안에 들어 있던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그렇게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42p
밤마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때면 정민은 외할머니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어두운 밤하늘에 수많은 전파들이 존재하듯, 외롭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온갖 얘기들이 말해주듯 인간의 삶 역시 항상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 삶은 예전의 삶과는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예전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이나 다름없으므로 영원한 거처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81p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한 바 있다. 권력이 훼손될 때, 그러니까 권력이 다른 곳으로 이양될 때, 폭력은 일어난다. 권력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정권 아래에서 폭력이 빈번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정권은 대리 감시자들에게 그 불안한 권력을 나눠주는 것으로 권력 유지의 한 방편을 삼는다. 그 대리 감시자들의 불안한 권력은 언제라도 다른 곳으로 이전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104p
그 모든 것은 나와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움직이는 유리창 저편의 세계처럼 보였다. 마치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기차 속에 탄 사람들을 바라볼 때처럼. 거기에는 내가 관여할 정의와 불의도, 진실과 거짓도, 꿈과 현실도, 삶과 죽음도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문제,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122p
"해진 티셔츠, 낡은 잡지, 손때 묻은 만년필, 칠이 벗겨진 담배 케이스, 군데군데 사진이 뜯긴 흔적이 남은 사진첩, 이제는 누구도 꽃을 꽂지 않는 꽃병.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그런 사물들 속에 깃들지. 우리가 한번 손으로 만질 때마다 사물들은 예전과 다른 것으로 바뀌지. 우리가 없어져도 그 사물들은 남는 거야. 사라진 우리를 대신해서. 네가 방금 들은 피아노 선율은 그 동안 안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곡이 됐어. 그 선율이 무슨 의미인지 당시에는 몰라. 그건 결국 늦게 배달되는 편지와 같은 거지. 산 뒤에 표에 적힌 출발시간을 보고 나서야 그 기차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기차표처럼. 안나가 보내는 편지는 그런 뜻이었어.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3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