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정 (한국)
역사|사계절|2015
★★★
2. 부여의 기원
부여의 동명 설화에서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부여의 북방에 부여 건국 전에 이미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다. 둘째, 부여의 시조 동명은 북이 탁리국 출신으로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 또는 엄시수를 건너 부여에 와서 왕이 되었다.
이를 종합하면, 부여는 처음 자리한 지역(지금의 지린성 일대)의 북쪽 땅에 살던 선주민이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 설화의 기본 줄기는 왕이 탁리국에서 엄호수를 거쳐 부여까지 망명해 도읍을 정했다는 부여족의 이주移住 전설이다.
부여 왕조의 구체적인 변동상은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오랜 만큼 주변 세력의 영향 아래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을 것이다. 이는 부여가 시기와 사료에 따라 북부여, 부여, 동부여 등으로 표기되는 점에서 입증된다.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초기 부여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계루부 왕실)이 나왔으며, 이 집단이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인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백제 건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들도 부여족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그 왕실의 성을 부여씨라고 했고,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했다. 또한 6세기 중반에 자신들이 남하해 세운 나라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했다.
3. 부여의 성쇠
부여는 3세기 중반까지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고 수도가 융성했다. 그러나 3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주변 정세에 따라 격심한 변화를 맞았다. 부여는 대평원에 자리 잡아 외침을 방어하는 데 취약했다. 유목민과 농경민이 교차하는 중간 지대였다는 점도 주변 세력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쉽게 받은 이유다. 특히 3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통일 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 세력이 왕성해져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그랬다.
랴오시 지역과 내몽골 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가 연燕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또 부여 남쪽에서는 고구려가 사방으로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진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기고(316~317) 쇠망함에 따라 부여는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 부여는 4세기 들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원래의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부여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연 가까이에서 고립무원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의 모용황에게 침입을 받아 중심 세력을 잃고 말았다. 이때 부여가 완전히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346년 이후 부여의 고토는 전연의 소유가 되고, 370년 이후에는 고구려에 병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중략) 346년 모용씨의 침입으로 부여가 멸망했다기보다는, 부여의 세력이 거의 무너지고 흩어졌으나 그 주민과 영토는 전연과 전진에 신속된 상태로 존재했으며 여전히 고구려와 말갈의 진격 목표로 존재했다고 본다. 346년에 연군燕軍이 부여를 한 차례 공격한 뒤 귀환했다고 보는 것은, 만약 부여의 수도에 계속 머물며 그 영역을 직접 지배할 경우 당시 서쪽으로는 후조와 대결을 벌이고 동으로는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뒤 대치하고 있던 연으로서는 상당한 병력 투여와 전쟁 지속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여인들은 연군이 돌아간 뒤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부여가 이렇게 명맥을 이은 것은 연이 북중국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그 압력이 줄어들었으며 고구려는 연의 침공에 타격을 입은 데 이어 남쪽에서 올라오는 백제 세력과 대결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 부여 세력은 광개토왕의 정복에 따라 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략) 결국 410년 고구려의 부여 정벌로 부여의 주민 다수와 넓은 지역이 고구려에 속했고,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부여 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4. 부여의 제도
부여의 왕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가 아니었다. 왕의 권력은 귀족 합의 기구의 제약을 받았다. 왕이 특정 가계 출신 중에서 뽑혔고,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마가·우가·저가·구가 등 '가加'들의 대표로 군림해도 초월적 존재는 되지 못했다. 마여는 제가諸加가 공립共立했고, 의려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고 했으니 역시 제가의 관여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여의 전성기인 2~3세기에 왕은 권력자인 동시에 귀족의 대표자라는 양면성이 있었기 때문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제가'가 공립한 것이다.
결국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한 국중대회는 '가'라는 고급 귀족 관료들의 평의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최후 결정권은 국왕이 가지고 있었다. 부여처럼 전국적인 지배 조직이 미비하고 각 지방 부족들의 자치력이 강한 사회에서, 영고*는 민속 행사일 뿐만 아니라 통합 기능을 수행한 정치 행사이기도 했다.
*영고(迎鼓) : 공동체의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하나로서 풍성한 수확제·추수감사제 성격을 지니는 부여시대의 제천의식
부여는 삼국 초기의 부部 체제 대신 사출도를 운영했는데, 이것은 방위의 이름이면서 중요 근거지에 대한 편제의 의미가 강하다. 땅이 대단히 넓은 부여는 사방을 교통로와 방어 개념으로 연관 지어 편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부여처럼 사출도의 방위명이 지역 구분의 중심이 되지 않고 5부족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는 5부족이 주체가 되어 부족 연맹을 조직했다는 뜻이다. 고구려 사회는 가부장 가족 세력의 증대와 족장의 지배력 강화가 부여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부 체제하 고구려는 5부 대가大加·제가諸加들의 연합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5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부와 왕권의 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부의 전신인 나那가 독자적인 소국이나 부족을 가리키는 반면, 5부는 고구려국의 주요 구성단위로서 왕권에 귀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여의 경우 지역 집단인 압로를 볼 때 독자성이 아주 강했다고 할 수 있다.